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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는 삶

조란 맘다니 뉴욕 시장 당선 스토리

by 사색하는 샘 2025.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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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새로운 시대를 연 34세 조란 맘다니

역사를 새로 쓴 당선 이야기

2025년 11월 4일, 뉴욕시는 새로운 역사를 썼습니다. 34세의 조란 맘다니가 앤드류 쿠오모 전 주지사와 공화당의 커티스 슬리와를 물리치고 뉴욕시 제111대 시장으로 당선된 것입니다. 이번 선거는 1969년 이후 처음으로 200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투표에 참여하며 뉴욕시 역사상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습니다.

맘다니의 당선은 여러 면에서 역사적입니다. 그는 뉴욕시 최초의 무슬림 시장이자, 최초의 남아시아계 시장이 되었습니다. 또한 1914년 34세에 취임한 존 퍼로이 미첼 이후 100년 넘게 나오지 않았던 최연소 시장이라는 기록도 세웠습니다. 이민자로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지 불과 7년 만에 미국 최대 도시의 수장이 된 그의 여정은 그야말로 놀라운 성과입니다.

당선 연설에서 맘다니는 브루클린의 지지자들 앞에서 "정치적 어둠의 시대에 뉴욕이 빛이 될 것"이라며 "여러분은 더 위대한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19세기 미국의 사회주의 정치인 유진 뎁스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정치적 뿌리를 분명히 했습니다.

예상을 뒤엎은 정치적 상승

출처: 중앙읿보

 

맘다니의 정치적 상승은 그야말로 극적이었습니다. 2024년 10월 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할 당시만 해도 그는 대부분의 뉴욕 시민들에게 낯선 인물이었습니다. 퀸즈 지역구를 대표하는 3선 뉴욕주 의회 의원이었지만, 전국적으로나 심지어 뉴욕시 전체에서도 인지도가 매우 낮았습니다. 초기 여론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은 고작 1%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2025년 6월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맘다니는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선두주자였던 앤드류 쿠오모 전 주지사를 12퍼센트 포인트 차이로 꺾은 것입니다. 1차 투표에서 44%를 득표하며 쿠오모의 36%를 압도했습니다. 정치 명문가 출신이자 전직 주지사, 그리고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을 역임한 쿠오모를 상대로 거둔 승리는 뉴욕 정치권에 충격을 안겼습니다.

예비선거 승리 이후 쿠오모는 무소속으로 11월 본선거에 다시 출마했고, 에릭 아담스 현직 시장도 제3당 후보로 참여했다가 9월에 사퇴하며 쿠오모를 지지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 직전 쿠오모를 공개 지지하며 맘다니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습니다. 맘다니에 반대하는 정치자금모금위원회들은 그를 저지하기 위해 4천만 달러 이상을 모금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맘다니의 압승이었습니다. 본선거에서 그는 50.4%를 득표하며 쿠오모를 9퍼센트 포인트 차이로 다시 한번 물리쳤습니다. 특히 45세 미만의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43퍼센트 포인트 차이로 앞서며 세대 교체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었습니다.

세 대륙을 거친 인생 여정

조란 크와메 맘다니는 1991년 10월 18일 우간다 캄팔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각자의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인물들입니다. 아버지 마무드 맘다니는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나 우간다에서 성장한 정치학자이자 컬럼비아 대학교의 저명한 교수입니다. 탈식민주의와 아프리카 정치를 연구하는 세계적인 학자로, 1972년 이디 아민 독재 정권에 의해 추방되는 등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머니 미라 나이르는 인도 태생의 세계적인 영화감독입니다. 1988년 데뷔작 '살람 봄베이!'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하고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르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2001년 작 '몬순 웨딩'은 150만 달러의 제작비로 3천만 달러 이상의 흥행 수익을 올리며 독립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미시시피 마살라', '네임세이크', '퀸 오브 카트웨' 등 그녀의 작품들은 정체성, 이주, 소속감이라는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었습니다.

맘다니는 아버지를 따라 가나의 초대 대통령 크와메 은크루마의 이름을 따서 중간 이름 크와메를 받았습니다. 이는 범아프리카주의에 대한 그의 아버지의 헌신을 상징합니다. 그는 5세까지 캄팔라에서 자랐고, 이후 가족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으로 이주했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막 끝난 남아프리카에서 어린 맘다니는 인종 차별의 여파를 목격하며 사회 정의에 대한 의식을 키웠습니다.

7세가 되던 1999년, 아버지가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직을 맡으면서 가족은 뉴욕으로 이주했습니다. 맨해튼 어퍼 웨스트 사이드의 모닝사이드 하이츠에 정착한 맘다니는 뱅크 스트리트 어린이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았습니다. 이 학교는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장려하는 진보적 교육 철학으로 유명했습니다.

사회 정의를 향한 첫걸음

맘다니는 명문 공립학교인 브롱크스 과학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학교 최초의 크리켓 팀을 공동 창설했고 학생회 부회장에 출마했지만 낙선했습니다. 이후 메인주의 보든 대학에 진학해 아프리카학을 전공했습니다.

대학 시절 맘다니는 팔레스타인 정의를 위한 학생회를 공동 창설하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학교 신문 '보든 오리엔트'에 정치, 문화, 스포츠를 다루는 칼럼을 정기적으로 기고했습니다. 2014년에는 이스라엘 학술 보이콧에 동참할 것을 대학에 촉구하는 칼럼을 공동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2014년 졸업 후 맘다니는 퀸즈에서 주택 상담사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압류 위기에 처한 주민들을 돕는 이 일을 통해 그는 뉴욕시 서민들이 직면한 주거 불안정과 경제적 어려움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이 경험은 그가 정치에 입문하기로 결심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5년 맘다니는 시의회 23선거구의 알리 나즈미 후보 캠페인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며 뉴욕시 정치에 발을 들였습니다. 2017년에는 민주사회주의자 미국당(DSA) 뉴욕 지부에 가입했고, 브루클린 베이 리지 출신의 팔레스타인계 루터교 목사이자 민주사회주의자인 카더 엘-야팀의 시의회 선거 운동을 도왔습니다.

주의회 진출과 시장 도전

2018년 맘다니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습니다. 우간다에서 태어나 남아프리카와 미국을 거친 그의 여정은 시민권 취득으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2020년 그는 퀸즈의 36선거구 뉴욕주 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2021년 의원직을 시작했습니다.

주의회에서 맘다니는 저렴한 주택, 보편적 아동 보육, 기후 정의 등의 이슈를 적극적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는 3선 의원으로서 퀸즈 지역구 주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했지만, 뉴욕시 전체에서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2024년 10월 맘다니는 2025년 뉴욕시 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당시 정치 전문가들은 대부분 그의 출마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앤드류 쿠오모가 압도적인 선두를 달리고 있었고, 맘다니는 11명의 후보 중 한 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맘다니는 풀뿌리 조직화의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수만 명의 무급 자원봉사자들이 그의 캠페인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소셜미디어를 적극 활용해 젊은 유권자들과 소통했고, 지역 곳곳을 직접 방문하며 시민들을 만났습니다. 선거 운동 막바지에 그는 하룻밤 사이에 브루클린의 여섯 개 나이트클럽을 방문하고, 일요일에는 부모님과 함께 교회 예배에 참석한 뒤 뉴욕시 마라톤 경기를 지켜보고, 캐시 호컬 주지사와 함께 버팔로 빌스 경기를 관람하며, 매디슨 스퀘어 가든 꼭대기층에서 닉스 경기를 관람하는 등 에너지 넘치는 활동을 펼쳤습니다.

정책 비전과 논쟁

맘다니의 정책 공약은 진보적이고 야심찼습니다. 그는 임대료 규제 아파트의 임대료 동결, 무료 버스 시스템 도입, 부자 증세를 통한 보편적 아동 보육 제공, 시영 식료품점 개설 등을 제안했습니다. 또한 2030년까지 최저임금을 시간당 30달러로 인상하고 저렴한 주택을 대폭 확충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러한 정책들은 뉴욕시 서민들의 생활비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그의 핵심 메시지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출구조사 결과 생활비가 유권자들의 최대 관심사였고, 이는 맘다니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진보적 입장, 특히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견해는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맘다니는 이스라엘의 가자 공격을 "집단학살"이라고 규정했고, 보이콧-투자철회-제재(BDS) 운동을 지지했습니다. 이는 세계 최대 유대인 공동체가 있는 뉴욕시에서 민감한 이슈였습니다.

선거 운동 초반 "인티파다를 세계화하라"는 구호를 규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은 맘다니는 이후 입장을 조정했습니다. 그는 랍비들을 만나고 유대교 대명절 기간에 회당을 방문했으며, 당선 연설에서 반유대주의에 맞설 것을 약속했습니다. 무슬림으로서 9.11 이후 자라온 그는 아랍어 표현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고 말하며, 해당 구호는 전 세계 억압받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경찰 문제에서도 맘다니는 입장을 조정했습니다. 2020년 소셜미디어에서 경찰 예산을 "삭감하자"고 했던 발언을 철회했고, 경찰을 "인종차별적"이라고 불렀던 게시물에 대해 공개 사과했습니다. 그는 민주사회주의자 미국당의 모든 우선순위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며, 독자적인 정강을 가지고 출마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개인적 삶과 문화적 정체성

맘다니의 개인적 삶도 그의 다문화적 배경을 반영합니다. 그는 2025년 초 시리아계 미국인 예술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라마 두와지와 결혼했습니다. 두 사람은 데이팅 앱 힌지에서 만났다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맘다니는 그녀를 "내 인생의 사랑"이라고 부르며, 6월 예비선거 승리 연설에서 감사를 표했습니다.

음악에도 재능이 있던 맘다니는 2019년 '미스터 카다몬'이라는 예명으로 "나니"라는 싱글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그의 외할머니에게 바치는 헌정곡으로, 뮤직비디오에는 요리책 저자이자 배우인 마두르 자프리가 외할머니 역으로 출연했습니다. 또한 그는 어머니 미라 나이르의 2016년 영화 '퀸 오브 카트웨'의 음악 감독을 맡아 2017년 음악 감독 길드 어워드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맘다니의 부모는 그의 정치 여정에 직접적인 조언을 하지는 않았다고 밝혔지만, 그들의 세계관과 작품은 분명히 그의 정치적 입장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머니의 영화들, 특히 '미시시피 마살라'와 'reluctant Fundamentalist'는 맘다니 가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고, 정체성과 소속감에 대한 대화의 장을 열었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시작

맘다니는 2026년 1월 1일 뉴욕시 시장으로 취임합니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크고 다양한 도시를 이끌게 되며, 860만 명 이상의 인구와 거대한 시 행정 조직을 관리해야 합니다. 34세의 나이에 정치 경험이 상대적으로 짧은 그에게는 큰 도전이 될 것입니다.

취임 준비팀은 다섯 명의 여성 공동위원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에릭 아담스 행정부에서 부시장을 지낸 마리아 토레스-스프링거, 조 바이든 대통령 시절 연방거래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리나 칸, 유나이티드 웨이 뉴욕시 지부장이자 마이클 블룸버그 행정부 출신인 그레이스 보닐라, 빌 드블라지오 행정부에서 보건·복지 부시장을 지낸 멜라니 하르초그 등이 참여합니다.

맘다니의 당선은 뉴욕시를 넘어 전국적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의 승리는 민주당 내에서 세대 교체와 진보적 변화를 원하는 움직임을 상징합니다. 동시에 공화당은 그의 좌파 정책을 다른 지역 선거에서 쟁점으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당선 연설에서 맘다니는 "이 순간이 필연적이었다고 믿고 싶지만, 제가 캠페인을 시작했을 때 취재하러 온 TV 카메라는 단 한 대도 없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지지율 1%에서 시작해 뉴욕시를 이끄는 자리까지 오른 그의 여정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 사례로 기록될 것입니다.

 

우간다에서 태어나 세 대륙을 거쳐 뉴욕에 정착한 이민자의 아들이 미국 최대 도시의 시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미국의 이민자 사회에 큰 의미를 가집니다. 맘다니 자신도 당선 연설에서 "뉴욕은 이민자들의 도시이고, 이민자들이 건설한 도시이며, 이민자들이 움직이는 도시이고, 오늘 밤부터는 이민자가 이끄는 도시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조란 맘다니의 시장 재임 기간이 성공적일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당선 자체는 이미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정치적 권력의 세대 교체와 다양성의 확대라는 미국 정치의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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