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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올드 보이』, 복수는 왜 달콤하지 않은가

by 사색하는 샘 2025. 10. 6.

들어가며 - 복수극의 새로운 지평

2003년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단순한 복수 영화가 아닙니다. 이 영화는 복수라는 행위가 가진 본질적인 모순과 파괴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며, 관객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복수는 정의의 실현인가, 아니면 또 다른 폭력의 시작인가? 오대수의 15년간의 감금과 그 이후의 여정은 복수가 결코 달콤할 수 없는 이유를 처절하게 보여줍니다.

복수의 시작, 그 불완전한 동기

영화는 평범한 가장 오대수가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15년간 사설 감금소에 갇히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 설정 자체가 복수극의 전형적인 구조를 뒤집습니다. 보통의 복수 영화에서 주인공은 명확한 가해자와 피해 사실을 알고 있지만, 오대수는 누가, 왜 자신을 가뒀는지조차 모릅니다. 이는 복수의 정당성에 대한 첫 번째 질문을 제기합니다. 복수는 정확한 인과관계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오대수는 그 출발점조차 불분명한 상태입니다.

석방된 오대수가 보여주는 복수심은 순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의에 대한 갈망이라기보다는 생존 본능과 분노, 그리고 자존심의 회복이 뒤섞인 감정입니다. 15년 동안 만두만 먹으며 텔레비전 속 세상을 보던 그는 이미 정상적인 인간이 아닙니다. 감옥에서 단련한 육체와 복수심은 그를 살아있게 했지만, 동시에 인간성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복수가 복수자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이우진의 복수, 계산된 잔혹함

영화의 진짜 복수자는 오대수가 아니라 이우진입니다. 그는 15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완벽한 복수극을 설계했습니다. 단순히 오대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파괴하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이우진의 복수는 정교하고 치밀하지만, 그 이면에는 누나의 죽음에 대한 깊은 상처와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우진의 복수가 오대수의 잘못에 비해 너무나 과도하다는 것입니다. 고등학생 시절 오대수가 저질렀던 것은 우연히 본 것을 친구에게 말한 것뿐이었습니다. 악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결과를 예상했던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우진은 이 사소한 행위를 15년간의 감금과 근친상간이라는 끔찍한 결과로 갚아줍니다. 이는 복수가 가진 본질적인 문제를 드러냅니다. 복수는 언제나 주관적이며, 그 정당성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수의 순환, 끝없는 연쇄

'올드보이'에서 가장 충격적인 반전은 오대수가 자신의 딸 미도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이 설정은 단순한 충격 요소가 아니라, 복수가 만들어낸 또 다른 피해자를 보여줍니다. 미도는 아버지의 복수극에 아무런 책임이 없지만, 가장 큰 피해자가 됩니다. 이는 복수가 결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대수가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그의 복수는 무의미해집니다. 그는 이우진을 죽일 수 있었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이미 자신의 삶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딸과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금기를 넘어섰습니다. 결국 이우진도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두 사람 모두 복수의 승자가 아닌 패배자로 남게 됩니다.

망각과 자기기만, 유일한 출구

영화의 마지막에서 오대수는 최면술사를 찾아가 기억을 지우려 합니다. 이는 복수극이 남긴 상처가 너무 깊어서 차라리 망각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절망적인 결론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완전한 망각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오대수의 미소는 진정한 행복인지, 아니면 스스로를 속이는 자기기만인지 모호하게 남겨둡니다.

복수가 달콤하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복수는 상처를 치유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새로운 상처를 만들고, 더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며, 복수자 자신도 파괴합니다. 이우진은 완벽한 복수를 완성했지만 공허함만 남았고, 오대수는 복수의 대상을 찾았지만 그것이 무엇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복수의 본질에 대한 질문

'올드보이'가 위대한 영화인 이유는 복수에 대한 단순한 긍정이나 부정을 넘어서, 복수의 본질 자체를 해부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복수가 인간의 원초적 감정이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순간 모든 것이 파괴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복수는 정의가 아니라 또 다른 폭력이며, 해결이 아니라 파멸의 시작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극단적인 상황 설정과 충격적인 반전을 통해 이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15년간의 감금, 산 낙지를 먹는 장면, 혀를 자르는 장면, 그리고 근친상간이라는 금기까지, 영화는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이 불편함이야말로 감독이 의도한 것입니다. 복수는 결코 편안하거나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나가며 - 복수를 넘어서

'올드보이'는 복수가 왜 달콤하지 않은지를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보여준 영화입니다. 복수는 일시적인 만족감을 줄지 몰라도, 그 대가는 너무나 큽니다. 오대수와 이우진 모두 복수를 완성했지만, 그 끝에는 공허함과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복수는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상처를 만들 뿐입니다.

이 영화가 개봉한 지 20년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회자되는 이유는, 복수라는 보편적 감정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복수를 꿈꿉니다. 하지만 '올드보이'는 그 복수가 실현되는 순간, 우리가 원했던 것이 아닌 전혀 다른 결과가 찾아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복수는 결코 달콤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쓰디쓴 독약이며, 마시는 사람도 마시게 하는 사람도 모두 죽이는 치명적인 독입니다.